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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학년도 입학미사 강론
[ 작성일 : 2022-03-07, 조회 : 418 ]
1. 개교 60주년입니다. 여느 때 같으면 신입생들의 부모님과 많은 신자들을 모시고 성대한 입학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데, 이렇게 조촐하게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3년째입니다. 내년에는 달라지겠지요.
    어쩌면 이렇게 소박하게 입학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알아들으라고 재촉하시는 시대의 징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많은 이가 죽고 힘든 삶을 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으로 수많은 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사회와 자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을 티브이나 인터넷에서 한낱 뉴스거리로 소비합니다. 미얀마의 고통도 우리에게서 잊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사태 앞에서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거나 기도 중에 간혹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모든 게 하느님 손에 달려 있는 것일까요?

2.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성대한 축제일입니다. 개교 60주년을 기념하고 신입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몇몇 신부님과 수녀님들 말고는 다른 손님도 없고 우리뿐이지만, 제대 앞의 화려한 꽃장식이 이날의 기쁨과 축하를 한껏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60주년 하면 뭔가 거창한 행사를 치러야 할 거 같은데, 우리 신학교는 올해 따로 행사를 마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동양 전통에서는 말하자면 우주만상의 운행이 한 바퀴를 돌아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오는 환갑에 큰 의미를 두지만, 교회는 서양 전통에 따라 25년을 주기로 성년 등, 기념제를 거행합니다. 우리 신학교도 10년 전에 2박 3일로 아주 성대하게 개교 50주년을 기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신학교 50년사의 발자취를 50주년 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2년 개교 50주년에 입학했던 현역 신입생들이 올 초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문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신학교 개교기념일의 진정한 의미는 서품에 있다고요. 신학교 개교의 목적이자 그 결실이 바로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올해 입학하신 60주년-둥이, 우리 신입생들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요.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10년은 금세 지나갑니다.

3. 잘 아시는 바대로, 우리 신학교는 한국천주교회의 첫 탁덕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로 모시고 1962년 ‘대건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했습니다. 그사이 교명이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바뀌고, 장소도 광주 쌍촌동에서 이곳 남평으로 옮겨왔지만, 오로지 하나의 목적인 사제 양성을 위해 60년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동안 올해까지 총 1049명의 사제가 배출되었지요.
    요즘은 사회에서도 환갑잔치를 거의 하지 않지만, 60년은 인간 나이에 견주어 볼 때 중후한 연륜의 때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신학교도 나이를 꽤 먹은 것이지요. 아니, 이제는 늙었다고, 전성기를 지났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서양 교회에 비해서는 짧은 한국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어쩌면 우리 신학교의 전성기도 갑자기 끝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전체 신학생 수가 300명을 훌쩍 넘었으니, 그처럼 숫자가 많았던 때가 우리 신학교의 전성기였을까요?
    올해 한국 교회 신학교마다 신입생들이 대폭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해마다 적어도 스무 명 정도는 채워졌으면 하는 게 간절한 바람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그렇다고 이 불안한 현실이 오늘 신입생 여러분의 탓도 아니고, 또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려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에 따르면, 교회의 전성기는 숫자에 달려 있는 게 아니겠지요.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한 사람의 성인이 나타나 교회에 다시금 새로운 활력과 전망을 불어 넣었고, 그렇게 해서 교회는 다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성인이 교회에 전성기를 가져다줍니다.

4. 이제 근심과 걱정, 온각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그 길은 애매하지도, 중간 중간 끊겨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예수님이 그 길이십니다. 그분께서 늘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걸으시고,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면 우리를 업고 걸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알아보는 것, 그분의 얼굴을 끊임없이 찾는 것, 그리하여 조금씩 그분을 닮으려는 열망일 것입니다. 이러한 열망이 있다면 그분은 분명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는 그분께서 우리의 이 열망에 불을 댕기셨기 때문에 이 자리와 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서 그분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디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또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2-43)

최후 심판의 장면으로 묘사된 마태오 복음 25장의 말씀을 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접했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저의 고2 여름 방학이었는데, 벽장 한켠에서 먼지 묻은 신약성경 단행본을 발견하고서는 작정하고 앉아서 읽다가 이 대목에서 턱 막혔습니다. ‘방황 가운데 내가 찾고 있던 하느님! 내가 잘못 찾고 있었구나!’

    우리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본질이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세상에는 올바른 질서와 높은 도덕규범과 공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종교, 사회, 공동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버림 받은 구체적인 한 인간, 소외되고 가난하고 쫓겨난 구체적인 한 인간 그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창조주요 세상의 심판관이신 그분께서 세상의 작은 이들과,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하느님을 믿든 믿지 않든 아무 상관없이, 당신을 동일시하신다는 점입니다.
    사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성소의 말씀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저는 이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죄스러움이 있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기꺼이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시겠습니까? 누구를 섬기겠다고 이 길을 나선 것입니까?
    주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지 않은 것이 바로 나를 섬기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