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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년도 졸업미사 강론
[ 작성일 : 2021-12-11, 조회 : 407 ]
1. 이번 학기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설마 비커에 갇힌 벼룩처럼 사신 것은 아니겠지요? 지난 월례 피정 때 김주남 부제님의 강론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 도입부가 벼룩 이야기였지요. 비커에 오랫동안 갇힌 벼룩은 막상 비커를 벗겨내도 그 사이 자신의 높이뛰기 챔피언 실력을 잊어버리고 그저 갇혔던 높이만큼만 뛴다는 슬픈 이야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신학교가 여러분에게, 아니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혹 비커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높이 뛰고 싶어도, 더 날고 싶어도 그 때마다 가로막히는 벽, 차단막, 이런 거 말입니다. 신학교에는 여러 규칙과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계선들 밖으로 뛰어서는 또는 튀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 지배합니다. 신학교는 여러분에게 비커와도 같을까요? 비커일까요?
    신학교 양성은 일정한 규격의 표준적인 사람으로 여러분을 꼴 지우고 틀 지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커 안처럼 그저 일정한 규격 내에서만 뛸 수 있도록 또는 튈 수 있도록 여러분을 가차 없이 훈련시키는 곳이 신학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잠재력을 상실하고, ‘나는 더 높이 뛸 수 있다’는 상상도 아예 망각하게 만드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어쨌거나 현재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이런저런 제약에 묶여 있습니다. 외출도 못하고, 맘대로 누구를 만나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교 안이 익숙해져서, 어느새 별로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사신 것은 아니었는지요? 더 이상 외출에 대한 갈망도 없이 비커에 갇힌 벼룩처럼 자포자기한 상태로 지낸 것은 아니었는지요? 아무튼 전 세계를 가두고 있는 이 코로나19 비커는 언제쯤 벗겨질 수 있을까요? 언제쯤 우리는 자유롭게 뛸 수 있고 자유롭게 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잘 생각해 봅시다. 이런저런 외적인 제약들만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일까요? 신학교의 수많은 규칙과 이제는 의미가 모호해진 오랜 전통들만이 우리의 자유와 잠재력을 억누르는 것일까요? 수시로 변이하며 보이지 않게 창궐하는 바이러스들만이 우리가 더 뛸 수 있다는 상상력을 집어삼키는 주범일까요?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갉아먹는 것일까요?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게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신부님들, 선배들, 형제들의 시선에 스스로 자신을 가두고 거기에 속박된 삶을 살지는 않으시나요? 어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 눈이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눈이다”(토마시 할리크). 이에 빗대어 말하자면,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그 눈이 바로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나의 그 눈이 정말로 나를 가두는 비커는 아니었을까요?

3. 조심스레 말씀드리지만, 신학교 양성이 누구에게는 가두는 비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소망합니다, 신학교 양성이 여러분에게 발판이 되기를, 특히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는 부제님들에게 발판이 되었기를. 말하자면 이게 없으면 허공에 붕 떠서 제대로 설 수도 없고, 결국에는 아찔한 추락 속으로 나가떨어지고 마는 그런 것 말입니다. 또는 신학교 양성이, 여러분이 마음만 고쳐먹으면 언제든 그것을 토대 삼아 더 높이 뛸 수 있는 스프링보드이기를 바랍니다.
    자기 발판을 다진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겁 없이 자유롭게 그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우리의 발판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 7,24-25).
    결국 무너지거나 추락하지 않도록 우리를 떠받치고 지탱해 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며, 반석 자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더욱 끌어올려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고 더 높이 뛸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온 우주의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학교 양성이 여러분에게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자신의 기초요 버팀목이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를 깨닫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깨닫고 확인한 사람은, 산을 내려가듯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산에서 내려올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원문에는 없는 말이지만,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영광의 산, 타볼 산에서 내려오던 참이었습니다. 직전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던 그 산에서, 저처럼 앞뒤 분간을 잘 못했던 한 제자가 이렇게 말했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부제님들에게 이 신학교가 계속 머물고 싶은 초막은 분명 아니겠지요. 어쨌든 오늘부로 부제님들도 다들 산을 내려가시게 되었습니다. 내려가시거든 부딘 자유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로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발판이요 버팀목이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꽁꽁 묶고,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굳건히 딛고 서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높이 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내가 갇힌 모든 내적 외적 장벽들 그 이상으로 뛸 수 없지만, 내가 주님께 꽉 붙어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나를 붙드시고 우주 끝까지 뛰어오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명심하십시오. 산을 내려가면 무엇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타볼 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가니 많은 군중이 그분께 마주 왔다”(루카 9,37)고 루카 복음은 전합니다. 그 많은 군중이 왜 그분께 마주 왔겠습니까? 그들이 무엇에 굶주리고 목말라 찾아 헤매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손길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주님을 대리하는 제자들의 손길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디서든 여러분에게 마주 오는 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주님의 제자, ‘거룩한 사제, 착한 목자’가 되십시오. 자주 반드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받은 교육과 부르심, 자신의 자리와 신원을 확인할 줄 아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