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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학년도 입학미사 강론
[ 작성일 : 2020-03-07, 조회 : 802 ]
1.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즉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요. 하느님께서야 완전하신 분이시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혹시 예수님에게는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인간이 되셨기에,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시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애당초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완전하게 되는 것은 성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일로 여기고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말씀으로 슬그머니 모르는 척하고 살면 될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이 말씀이 아마도 부당하다고 느꼈는지, 병행구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이 표현과는 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아,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적어도 자비로운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그런 희망과 막연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있지 않을까요?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이 말씀 앞에 바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예를 하나 드십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지만 말이 그렇지, 원수를 사랑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용서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어야겠다고 수백 번 결심해도, 끝내 마음은 안 따라갑니다. 오히려 반대로, 심지어는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게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만을 보아도, 기도하면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원수를 저주하는 말이 다반사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9편은 “저의 원수들은 수치의 옷을 입고 창피를 덧옷처럼 두르게 하소서”(전례 시편 109,29) 하고 기도합니다. 시편 13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전례 시편 13,5). 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일어나소서, 주님. … 저의 하느님. 당신은 제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수시리이다”(전례 시편 3,8). (참고로 이 시편 구절들은 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들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야말로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이라 함은, 가족과 친척, 그리고 좀 더 넓게는 같은 부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웃에 속한 이들은 잘 지키고 그 외에 원수들은 멀리하고 물리쳐야만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친구는 도와주고 원수는 쳐부수는 것’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달리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관행과 규범을 깨뜨리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예수님은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도 밝히십니다. 그분이 이르시기를,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이상주의자처럼 보이십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이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실 때는, 그분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십니다. 곧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더 받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만큼만 받고 해주는 만큼만 되돌려 받을 뿐,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 크게 써야 더 큰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데서 제자들의 정체성, 신원이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는 이들만 좋아한다면, 그것은 세리나 다른 민족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너그럽게 대해주는 사람에게만 호의를 베푼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지, 어디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보다 세상과는 ‘다르게’, 세속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다르게 사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미워하고 배척했던 이들, 곧 ‘원수’라고 여겼던 이들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당신 곁에 가까이 부르시고 고쳐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마저도 자비로이 받아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그분처럼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3. 이제 다른 한 가지, 성경에서 ‘완전하게 된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성서학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또 다른 대목에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법을 찾겠다고 예수님께 다가온 어느 부자 청년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때 ‘완전한’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타밈tamim’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적인’ ‘나뉨 없는’ ‘온전한’이란 의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성서적 의미로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전적으로 나뉨 없이 하느님 앞에 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로핑크, 『예수 마음 코칭』, 176 참조). 부자 청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결국 울상이 되어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자기 것은 남겨 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뭔가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는 불안을 느낀 때문인지, 그는 ‘너의 전부를’ ‘너의 온 마음을 달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두 마음을 갖지 않으신다고요.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고요. 그분은 두 마음 없이, 나뉨 없이 다 주십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 마음에 비하면 당연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비하면 작은 겨자씨 한 알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뉨 없는 마음을 가진다면, 나의 전부를 하느님께 건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뉨 없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닮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크든 작든 사명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온전히’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삶을”(로핑크, 『예수 마음 코칭』, 177) 삽니다.

4. 친애하는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은 다르게 사시겠습니까?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시겠습니까?
    친애하는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은 두 마음 없이 사시겠습니까? 온전히 나뉨 없는 마음으로 사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