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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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인들(103위)을 위시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을 가진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재확인시켜주고, 또한 성직자 양성이 가장 요긴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골롬반회 소속 미국인 현 신부(Rev. Harold W. Henry)는 1933년 10월 광주에 도착하여 신앙의 불모지 전남지역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음 선포에 전심하였고, 1950년 광주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사목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방인 사제의 양성이 시급함을 인식했던 것이다.

서울의 가톨릭대학(당시 성신대학)만으로는 성직자의 부족을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감지한 현 주교는 광주에도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국(미국) 방문을 자주했었다.

마침내 광주시 쌍촌동 305번지에 9만여 평의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연건평 2,500여 평의 학교 시설을 갖추어, 1962년 3월 7일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성인을 주보로 모신 대건신학교가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다.

건축공사가 거의 마무리되는 해 1961년 3월에는 이미 신학생 18명이 당시 광주시 금남로 4가 22번지 소재의 한 낡은 목조건물에 대건신학당이란 현판 아래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현 주교는 대학의 운영을 미국 예수회 위스컨신 관구에 위촉하였고, 우선 진성만(베드로) 신부로 하여금 신학생들의 영성지도와 라틴어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1962년도는 두가지 큰 경사가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3월 7일 대건신학교의 설립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3월 15일 광주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설립자 현 주교가 대주교로 수품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지역 안배에 따라 광주와 대구관구 소속 신학생들과 예수회, 살레시오회, 프란치스꼬회 소속 신학생들은 대건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어, 철학과 21명, 라틴어반 22명이 입학했고, 초대 교장으로는 예수회 소속 미국인 박후버(Rev. Andrew H. Bachhuber S.J.)신부가 취임하였다.

학교건물 중앙에 위치한 자습실은 원래 공동기숙사였는데 설립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헨리관(Henry Hall)이라고 명명했고, 동쪽 기숙사 건물을 브레디관(Brady Hall)이라 칭하여 미국에서 건축 기금 모금을 도와주었던 브레디 주교를 기념하며, 본관 현관 바닥에 새겨진 브렌난 주교 기념 신학교(Brennan Memorial Seminary)라는 글귀는 현 주교의 선임 교구장 안주교(Msgr. Patrick Brennan)를 기념한다. 안주교는 광주교구장 재직시 6. 25때 납북되어 끌려간 후 소식이 없었다.

1964년 7월 학교법인 대건학당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동년 10월 26일 사립학교법 및 동법 시행령 개정에 의해서 새로운 학교법인 대건학당이 설립 인가되자 초대 이사장으로 설립자인 현 대주교가 취임했다.

1965년 1월 13일부로 대건신학교는 대건신학대학으로 설립 변경이 인가되어 사제직 서품까지의 7개년 과정 중 4개년만이 정원 160명의 단과대학으로 법적 인정을 받게 되었고, 교장 박후버 신부는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1966년 10월 제2대 학장으로 예수회 소속 미국인 길로렌 신부(Rev. Kenneth E. Killoren, S.J)가 취임하였고, 동년 11월에는 강의실 81평을 증축하였다.

1968년 2월 10일 제3대 학장으로 예수회 소속 미국인 도일 신부(Rev. Terence W. Doyhle, S.J)가 취임하였다. 동년 11월에는 전망편집부가 발족되어 신학전망이라는 대학 학술지를 계간별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본 학술지는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글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신학도들로 하여금 철학과 신학의 동향을 익히게 하고 본교 교수들의 연구 논문도 발표케 하고 있다.

1969년 11월 28일 대학운영권이 예수회로부터 광주관구와 대구관구 주교단으로 이양되어 부산교구 출신 이경우 신부가 제 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방인 사제들을 중심으로 한 교수단이 형성되었고 한국교회가 요구하는 사제 육성에 걸맞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성당과 강당이 준공되었고, 1975년에는 도서관과 기숙사의 증축과 사제관 신축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시설도 확장되었다.

1972년 2월에는 예비과 과정(라틴어)이 폐지되었고, 1973년 대학원 설립인가는 사제 양성에 필요한 교육기간 6년 조정과 때를 같이하여 실현되었고 7년제에서 6년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6년반을 수학하였다.

1980년 졸업 정원이 40명에서 70명으로 증원, 재학생 규모가 180여명에서 300명대로 늘어났다.

1974년에는 전 이사장 고 한공렬 대주교 1주기에 한 대주교의 유물을 매각하여 장학회가 발족되었고, 현재 다른 4종의 장학기금의 기초가 되었으며, 특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신학생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다.

1976년 2월에는 6년 과정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1978년도에는 하계 신학강좌를 개설해 평신도와 수도자들에게도 신학연구의 기회를 주었고, 1983년부터는 대건교리신학원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2년 코스 12시간씩 교육을 1997년도까지 실시하였다.

1982년에는 대구교구에도 선목신학대학이 개교됨에 따라 부산교구를 제외한 대구관구 소속 신학생들이 대구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광주관구와 춘천, 원주, 부산교구 소속 신학생들 및 수도회(살레시오, 예수고난회)소속 신학생들은 본 대학에 남게 되었으나, 신학생수는 전체적으로 열세였다.

1982년 3월 7일 본 대학 주보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을 정문 좌측에 세워 제막식을 갖고 대학 설립 20주년 행사를 가졌다.

1984년 5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본교를 방문하셨다.

1985년 3월 1일부로 본 대학의 이름은 ‘광주가톨릭대학’으로 개명되었다.

1987년 5월 4~6일 본 대학 설립 25주년을 맞아 수도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 선배동문들로부터 바람직한 사제상과 신학교 생활에 대해 강연을 듣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1991년 부산 신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본 대학 지원자가 광주관구와 살레시오, 예수고난회 소속 신학생으로 축소되었다.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1994년 3월 1일부로 학교 명칭이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변경되었고, 당시 학장 김민수 신부가 초대총장으로 추대되었다.

본 대학교의 장소가 광주시 발전으로 인해 중심지화 되어가고 학교시설의 노후와 교육적, 경제적 이유로 1993년부터 대학 이설 계획을 추진하여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170번지에 대지 106,588평 건물 21개동, 연건평 8,197평으로 하여 1995년 10월 18일 새 교정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이사주교들과 교수들이 1990년부터 신학교의 교육과정을 다시 7년제로 해야 한다는 뜻을 모았기에 6년제 교과과정을 7년제에 맞도록 연구를 시작했고(1976년부터 6년제로 축소되었음), 1997년 입학생부터 7년제가 적용되도록 했다.

1998년 1월 16일부터 광주시 서구 쌍촌동에서 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새교정으로 이사를 시작해 1998년 2월말부터는 새로운 교정에서 첫 학기를 시작했고 영성관과 교구별 생활관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 교정은 광주가톨릭대학교 부속 평생교육원(1999. 4. 9) 시설로 활용하게 되었다. 동년 3월 1일부터 신학연구소 규정안(97년 2월에 설립되어 규정안을 만들었음)이 시행되었다.

2002년 9월 2일 3대 총장 범선배 신부의 후임으로 광주교구 소속 이영헌 교수신부가 제 4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그동안 영성의 해 운영, 영성관 및 생활관 운영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새 규정들을 정비했으며, 한편 2001년에 발표된 한국 사제 양성 지침에 따라 7년제 교과목을 새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신학생들의 복지에 도움을 주고자 학생관 3층을 개조한 만남의 방, 노래방, 헬스장, 당구장등의 시설에 대한 축복식이 동년 9월1일에 있었다.

관구 주교 이사회(2003. 1. 9)에서는 2003년 1학기부터 영성관 체제를 1년으로 결정하여 영성관에는 1학년 신학생만 기거하게 하였고(1998년부터 영성관에서 1, 2학년 신학생들이 기거했음), 철학이나 신학을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은 수도자와 평신도들도 신학생들과 함께 청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였다(공개강좌 실시).

2003년 7월에는 6년제에서 7년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6년반과정 학생이 서품되었다.

2003년 9월 26-27일에 본교출신 주 방그라데시 교황대사 장인남 바오로 대주교(2003. 1. 6성성)는 인사차 본교를 방문하였다.

2003년 7월 16일-11월 25일 도서관 앞 광장과 옥상 및 외벽공사, 생활관과 영성관 옥상공사, 베리따스 광장 스텐드 보수공사를 하였고, 2003년 11월 21일-2004년 1월 20일 정문개보수 공사를 하였다.

11월 7일에는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제 8회 학술 발표회를 “생태계의 보존과 개발”이라는 주제로 본교 신학연구소의 주관으로 개최하였다. (1977. 4. 28에 제 7회 학술 발표회가 개최되었음)

2004년 1월 9일 관구주교이사회는 “제 2영성의해 지침 및 운영계획”과 “제 2영성관 생활내규”를 인준하여 2004년도 1학기부터 제 2영성의 해(연구1년 교구 신학생)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11월 5일에는 제 9회 학술 발표회는 “호남지역 초기 천주교 공동체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05년 5월 20일에는 사제서품 30주년 기념으로 본교출신 (1975년 7회 졸업)신부들이 대건축제 기간동안 모교를 방문하는 Home Coming Day 행사를 가졌고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예수평화상을 축복했다.

9월 10일에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 Manuel Ruiz Jurado 신부(예수회 소속)가 본교를 방문하여 전교생을 대상으로 미래사제로서의 영성생활에 대하여 특별강의를 하였다.

11월 4일에는 제 10회 학술 발표회를 “민족화해를 위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06년 2월 28일에는 처음으로 4학년을 대상으로 총장 이영헌 신부가 착의식을 거행하였다.

9월 4일에는 총장 이영헌 신부의 후임으로 전주교구 소속 정승현 신부가 제 5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1월 3일에는 제 11회 학술발표회를 "다종교사회와 한국 가톨릭 교회"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07년 2월 관구주교이사단과 교구신부단은 향후 신학생 양성방향의 틀을 세가지 축 즉, 지적양성.소공동체.사도직실습이 함께 균형을 맞추는 양성을 이루어나가기로 하여 교과목을 새로 개편하고 소공동체 생활을 위해 영성관에서 제1영성관(1학년)과 제2영성관(5학년)이 함께 생활하도록 영성관과 생활관 체제를 정비하였다.

11월 2일에는 제 12회 발표회를 "청소년을 위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08년 10월 18일 주한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Osvaldo Padilla)대주교가 광주대교구를 공식 방문하는 기회에 본교를 찾아오시어 교수단과 학생들을 위해 축복해주시고 격려해주셨다.

11월 7일에는 미국 베일러대학 유태학 연구소 소장인 마크 엘리스(Marc H. Ellis)교수를 초청하여 전교생 대상으로 “국가폭력과 제국주의 그리고 종교”에 대하여 강연을 들었다.

2009년 11월 6일에는 제 13회 학술발표회를 "다문화사회와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10년 5월 17일에는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학술발표회를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개최하였다.

2010년 8월 30일 총장 정승현 신부의 후임으로 광주대교구 소속 노성기 신부가 제6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1월 5일에는 제14회 학술발표회를 "한국사회와 천주교문화"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2011년 2월 현재 본교 출신 사제가 890명에 이른다.